경주예술학교
경주예술학원(慶州藝術學院)은 신라대천년문화(新羅代千年文化)의 축소체(縮小體) 학원흥망(學院興亡)은 군민면목(郡民面目)에 반영(反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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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보 (1946.07.29)
·자료 내용
경주(慶州) 전체(全體)가 종합예술학교(綜合藝術大學)의 표본 교실(標本 敎室)이라는 것은 벌써 세인(世人)의 상식(常識)으로 듸야잇는터 이언이와 이를 축소(縮少)한 것이 곳 경주예술학원(慶州藝術學院)이다. 구도(舊都) 경주(慶州)의 따뜻한 품속에서 모든 전제(田제)와 모든 인과(因果)와 필연(必然)할 숙명에 얼키어 산□을 세간(世間)에 전(傳)하게 된 본(本) 학원(學院)인지라 표면(表面)으로 보면 순조(順調)로히되고 주(□) 전하는 줄로 알는지는 알 수 업스나 금일(今日)에 이르는 도정(道程)에는 가지가지의 고초(苦楚)와 지장(支障)이 가로노여 필성(必城)을 기(基)하는 동학원(同學院) 전 部□의 의지(意志)를 시험(試驗)하였다. 그러나 만난(萬難)을 배제(排除)하고 악전고투(惡戰苦鬪)하 결□(結□) 마츰에 비장(悲壯)한 결의(決意) 하(下)에 된 것이 결(決)코 하날에서 떠러진 긋이 안이며, 땅에서 발출(發出)된 긋도 안이다. 조선(朝鮮) 젊은 문화인(文化人)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경주문화협회(慶州文化協會)를 조직(組織)하야 일심협력(一心協力)한 결과(結果) 몃몃 사람들의 피와 땀의 결정(結晶)으로 경주예술학원(慶州藝術學院)이 출현(出現)하였다는 것을 기록(記錄)에 보존코자한다. 그 다음 동학원(同學院)의 산파역(産婆役)은 경주보선구(慶州保線구)이니 그의 熱 열정(熱□)이야말로 감동(感動)하지 안을 수 업다. 교사(校舍)와 만여평(萬餘坪) 용지用地)를 □□도 안코 제공(提供)한 철도국보선□(鐵道局保線□) 당국(堂局) 책임자(責任者)의 협조(協調)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할(役割)을 한 초대원장(初代院長) 이채우씨(李採雨氏)의 용단(勇斷)과 방계적(傍系的) 협력(協力)을 악기지 안켔다고 맹세(盟誓)한 정덕영씨(鄭德永氏) 등의 진력(盡力)도 간과(看過)할 수 업슬 것이다. 이러한 험로난정(險路難程)을 격거 금년(今年) 3월(三月) 18일(十八日) 당국(堂局)의 정식인가(正式認可)를 어더 개교(開校)하게 되었다. 북(北)으로 흐르는 형상강(兄山江) 상류(上流) 자연악(自然樂)을 들으며 편편진보(片片眞寶)의 남산(南山)과 청송(靑松)이 욱어진 선도산(仙桃山)으로 화병(畫屛)을 둘는 선경(仙境) 오색단청(五色丹靑)한 고풍(古風) 조선식(朝鮮式) 교실(敎室) 속에 단정(端正)히 안자 □□히 수학(修學) 연마(硏磨)에 힘쓰는 젊은 학도(學徒)들은 장래(將來)할 새조선(朝鮮) 예인(□人)으로 부족(不足)이 업슬 것을 밋는다. 문화협회(문化協會)의 빈약(貧弱)한 재정(財政)으로 생활비(生活費)의 십분지일(十分之一) 도채 못되는 박우(薄遇)를 감수(甘受)하면서 원대(遠大)한 이상 (理想)의 성취(成就)에 자자(孜孜)히 노력(努力)하는 교수제씨(敎授諸氏)의 위대(偉大)한 정신(精神)에는 감사(感謝)의 말을 드림이 도리혀듯 그러운 감(感)이든다.
·출처 및 기타
자료 출처 : 대구시보
자료 형태 :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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